
"잘 하고 있나, 신참"
루 로아 소위까지 나타나서 한 마디 했다. 니키는 페인트칠이 징벌인 이유가 페인트칠 자체의 노동량이 아니라 이렇게 나타나는 구경꾼들 때문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보시다시피죠, 루 로아 소위"
"그런가, 농땡이 치고 있는 건가"
"........"
니키는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스프레이건을 움직여댔다.
"어이어이, 그렇게 삐지지 말라고. 좀 쉬엄쉬엄 하면 뭐 어때"
"루 로아 소위는 뭐 따로 할 일이 없나요?"
계속 등을 돌린 채로 니키가 말했다. 그래서 오스틴 군조가 양 어깨를 으쓱,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정비반과의 미팅도 좀 전에 끝났다. MS 파일럿이라는 건 전투가 없으면 한가하기 마련이라고. 뭐, 전투분석도 해야하긴 하지만, 니키의 작업이 끝날 때까진 그것도 못 하지"
"어째서죠?"
드디어 니키가 다시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장갑 호버트럭은 앞으로 한동안은 우리들의 이동 사령부다. 연방군의 기계류를 지온 장비로 교체할 필요성도 있겠지. 페인트칠이 끝나지 않으면 장치들을 시험해볼 수 없다고"
"왜 그렇죠. 컴퓨터 조정 정도는 페인트칠과 병행할 수 있지 않나요"
"소위님, 군용 레이더의 전파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계시죠?"
"화학 센서 주위에 페인트를 좌악 뿌려놓으면 어떻게 될까나"
두 사람의 지적은 모두 니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점들이었다. 미노프스키 입자가 레이더를 무력화시킨다고는 하지만, 환경만 받쳐준다면 레이더는 아직도 유효한 병기였다. 장갑 호버트럭은 직선적인 차체의 표면이 레이더 소자(素子)의 역할을 수행하는 컨포멀 레이더를 채용하고 있었다. 니키를 바로 앞에 둔 상태에서 레이더를 작동시키면, 전자 렌지에 돌린 것처럼 잘 익은 신임 소위가 금새 완성될 터였다.
화학 센서는 레이더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외부의 화학물질의 변화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탐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굉장히 섬세한 센서인 만큼, 근처에서 스프레이로 도료를 뿌려대면 센서가 망가질 게 뻔했다.
"그런데 왜 기재의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연방의 장갑 호버트럭을 이동 사령부로 삼는 거죠?"
"소위님, 그렇게 느긋하게 보급만 기다리고 있다보면 필요한 게 도착할 때 즈음 전쟁이 끝날 겁니다요"
"게다가 이건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행동이지"
"전략적? 무슨 뜻이죠, 루 로아 소위?"
"사관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나? 손자병법에도 '적의 곡물 1 종(種, 약 120 리터)을 확보하는 것은 아군의 군량미 20종을 확보한 것과 마찬가지 효과'라고 나와있잖나. 우리가 연방군의 기재를 이용하면 그만큼 아군은 기재를 운송하는 데에 힘을 덜 써도 되지. 모든 부대가 똑같이 한다면 보급 부담이 확 줄어든다고. 사이드3에서 지구까지 뭔가를 운송하는 것과 지구에서 조달하는 것 중 어느 게 손이 덜 가는지는 신참이라도 알겠지"
"그런 연고로, 소위님 잘 부탁합니다. 우리 군의 보급은 소위님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고요"
니키는 다시 스프레이건을 움켜쥐었다. 납득이 안 된 건지, 그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이건 성가신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
루 로아 소위 일행은 장갑 호버트럭 밖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게라트 소좌는 이미 안에서 전투분석에 임하고 있었다. 그가 이 장갑 호버트럭을 사용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야전부대의 지휘차이기 때문이었다. 센서나 통신능력이 뛰어나기에, 펜릴대에게 꼭 필요한 기재였던 것이다.
그 장갑 호버트럭을 원한 부대는 펜릴대 이외에도 여럿 있었으나, 기지를 점령한 것이 펜릴대인 이상, 당연히 그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센서 테스트는 아직 못 했지만, 컴퓨터 시스템의 환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컴퓨터에 악성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심어두고 일부러 지휘차를 버리고 떠난 적군도 있었지만, 이번 적은 그렇게까지 악질적이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미가키의 정비반이 개발한 바이러스 체크 프로그램은 지휘차 컴퓨터의 이상한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처분해버렸다.
물론 외부 기억장치나 여러 개의 메모리 유닛은 정보분석을 위해 강하한 본대의 정보부대로 보냈다. 그 안에는 연방군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겨있을 수도 있었다.
게라트 소좌가 이 전쟁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은 이 시점이었다. 차 안의 기재의 대부분은 그의 눈에도 익숙한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 사의 제품이었다. 지온군도 사용하고 있는 제품들이었다. 바이러스 체크 프로그램이 손쉽게 작동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이 전쟁의 승패가 어찌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연방이 이겨도, 지온이 이겨도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는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승리자는 그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허무한 느낌을 져버릴 수 없었다.
"뭐가 성가시다는 건가요? 대장님"
남에게 들리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밖으로 새어나간 모양이다. 옆에서 시스템 조정을 하고 있던 샤를로테 헤프너 소위가 질문해올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소리내어 말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앗, 아아, 이거다. 공작대의 자쿠를 격파한 전차대 말이다"
"그, 어리버리하게 접근을 허용해버린 전차대 말씀이시죠?"
"어리버리하게 접근을 허용...한 건가"
"어리버리하고 말고요. 자쿠의 등쪽 장갑이 약하다는 건 연방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 자쿠는 등을 61식 전차에게 맞아서 격파당했죠. 등 뒤로 적이 진입하게 허용하지 말 것. 사관학교에서 지겨울 정도로 들은 말입니다만"
확실히 얼핏 보면 헤프너 소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공작대의 자쿠는 구형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모빌슈츠. 61식 전차 정도의 상대에게 손쉽게 격파당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게라트 소위는 공작대의 자쿠를 파괴한 상대방에 주목하고 있었다. 공작대의 자쿠에게 치명상이 된 것은 등쪽 장갑의 관통상이었다. 하지만 격파당한 자쿠는 전면 장갑에도 포탄을 맞은 흔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61식 전차의 주포 정도로는 전면 장갑을 관통할 수 없는 법이고, 실제로도 관통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탄흔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러 개의 포탄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명중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등쪽 장갑의 관통상 2개도 마찬가지였다. 곧 이 자쿠를 쓰러뜨린 부대는, 복수의 전차 주포를 동시에 동일 지점에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자쿠를 격파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방법은 게라트 소좌도 처음 본 것이었다. 아마도 이 전차부대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전술인 모양이었다. 항공기지는 거의 무상으로 점령했지만, 안타깝게도 무장해제에 응하지 않고 탈출한 부대가 있었다. 펜릴대도 거기까지 커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포로 중에 해당 전차부대에 소속된 이가 없는 만큼, 그들은 무장해제에 응하지 않은 탈출병들 사이에 있다고 봐야 했다.
그들의 새로운 전설을 실제로 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늦든 빠르든 연방군은 대 MS 전술로서 61식 전차를 집중시키는 방법을 광범위하게 쓰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는 적으로 취급조차 잘 하지 않았던 61식 전차도 무시하지 못할 전력이 되는 것이다.
- 아무래도 이 전쟁은 꽤나 길어질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게라트 소좌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샤를로테 헤프너 소위는 다른 걱정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대장님, 본대의 강하도 그럭저럭 무사히 끝난 모양입니다만..."
"아아, 그런 것 같군"
"우리 부대에의 보급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교두보의 확보가 최우선이지만, 거점 확보에도 성공한 만큼 우리 보급을 우선시 해주겠지"
"아, 정말입니까 대장님! 그럼 다음 작전에서는 저도 MS 파일럿으로 출격할 수 있겠군요!"
"아아아아... 거기까지는... 단언 못하겠다만...."
"에엑, 어째서입니까! 지금 보급이 우선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거죠! 그건 역시 제가..."
게라트 소좌는 이후 30분동안 샤를로테 헤프너 소위를 설득하느라 애썼다. 그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 구식이라도 좋으니까, 자쿠를 당장 배치해 다오.
이렇게 게라트 소좌는 지휘관의 직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덧글
장갑묘 2009/10/29 21:25 # 답글
역시 소설에서도 언급되는 악의 축 애너하임이군요.일년 전쟁 시대부터 여기저기 팔아먹다가 결국 사나리에게 발리는 우주세기의 악당 애너하임이여!
그런데 자쿠 장갑 설정은 설정마다 제각각이라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군요.
개드립 오피셜즈에 따르면 90밀리미터 머신건에도 가볍게 뚫리는 티탄-세라믹과 초고장력강인데,
150 밀리미터 활강포에 관통이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더욱이 삼중 허니컴 구조인지 개뿔인지 루나 티타늄도 같은 곳에 또 명중당하면 관통이 되죠.
게다가 루나 티타늄 합금도 빔 라이플에는 무력한데
GP01은 빔 라이플 직격에도 버텼으니 GP01이야말로 우주세기 최강 기체인지 모릅니다.
AyakO 2009/10/30 04:06 #
Gp01은 빔 머신건에 맞았으니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빔라이플보다는 떨어지지 않을까요...음 61식 주포를 전면 장갑 중에서 제일 두꺼운 몸체에 맞으면 버티지 않을까요...
부위별로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같은 곳 계속 맞으면 뭐 뚫리겠지만...
장갑묘 2009/10/30 21:08 #
그럴 리가요.오피셜즈에 따르면 자쿠의 초경강 합금은 60밀리미터 발칸 직격에도 버티지 못합니다.
90밀리미터 탄환 직격에 버티는 장갑은 루나 티타늄 합금이 유일하죠.
그냥 개드립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작품마다 연출이 멋대로라서 판단할 근거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만.
AyakO 2009/11/01 04:55 #
그 60mm 발칸이라는 게 혹시 RX-78의 머리에 달린 그것은 아닐까요... 예전에 건담 헤드발칸은 탄환도 건다리움 합금이라 자쿠 장갑으로 못 막는 게 당연하다는 글을 나우누리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뭐 확실히 작품마다 연출이 제멋대로라는 게 제일 어려운 문제긴 하겠네요
사실 전 Ez-8의 장갑이 제일 궁금합니다. 뭔데 팔뚝으로 히트소드랑 맞짱을 떠도 되는 건지(....)